디저트 뮤지엄을 나와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는 마닐라베이 쪽으로 향했다.
디저트 뮤지엄에서 마닐라베이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닐라베이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친구들과, 또는 연인과 자리를 잡고 술 한 잔과 함께 지는 노을을 감상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우리도 한쪽에 자리를 잡아 노을을 감상하고, 노래를 부르고, 퀴즈 맞히기 대결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파진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아까 눈 여겨봐둔 디저트 뮤지엄 근처 파파이스로 향했다.
햄버거 세트와 치킨을 시켰는데 세상에, 파파이스가 이렇게 맛있었던가!
한국에서는 1n년 전에 한두 번 가봤던 것 같은데 외국에서 오랜만에 다시 찾은 파파이스는 대만족이었다.
치킨 왜 이렇게 잘 튀겨! 케이준 감자도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은 후(추가주문까지 함), 마닐라베이를 따라 호텔 방향인 북쪽을 향해 계속 걸어 올라갔다.
https://maps.app.goo.gl/dWQvnySfoh1pbmPK6
북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우리나라 월미도와 비슷한 야외 유원지 SM by the BAY가 나왔다.
널찍한 공원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빛을 뿜으며 신나게 돌아가는 놀이기구들과 맛있는 간식을 파는 매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이가 놀이기구를 타고 싶다길래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에서 10분가량 기다리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는데, 아뿔싸... 현금 결제가 안 된단다.
사실 이곳에 올 계획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제 시스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냥 가려는데 옆 줄에서 티켓을 사던 아랍계 청년이 우리의 티켓을 함께 계산하겠다고 하며 자신의 QR코드를 찍었다.
깜짝 놀라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했다.
아랍 청년은 필리핀에서 좋은 시간 보내라며 손을 흔들며 쿨하게 퇴장했다.
덕분에 아이와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동차 모양 놀이기구를 탔고, 아이는 정말 행복해했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게 베푸는 호의가 그 누군가에겐 따뜻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아셨던 걸까.
https://maps.app.goo.gl/R68Vs6iePibsL6449
우리는 마닐라베이를 따라 윗 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호텔까지는 이제 도보로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
이렇게 된 김에 우리는 호텔까지 택시를 타지 않고 구경하면서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밤 8시를 넘긴 캄캄한 마닐라에서 객기를 부린 여행자의 최후를...
시끌벅적한 음식점들과 호프집을 구경하고, 유튜브를 촬영 중인 댄스팀(여자 둘에 남자 둘인 혼성팀이었는데 올검 패션의 남자분이 엄청 유연해서 가장 눈에 띄었다)의 공연도 옆에서 쭈그려 앉아 구경했다.
촬영이 끝나자 우리가 박수갈채를 보냈더니 파워풀한 댄스를 보여주던 모습과는 달리 꽤 부끄러워 하셨다.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세븐일레븐을 들러 요거트 음료랑 생수를 산 후, 구글맵이 알려주는 대로 왼편으로 꺾어 다리를 건넜다.
이제 호텔까지는 약 20분이 남은 상황.
(급 어두워지는 전개 주의)
그 다리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인적은 점차 뜸해졌고, 다리 밑 강물에서는 악취가 훅 풍겨져 왔다.
숨을 참고 잰걸음으로 빠르게 다리를 건넜다.
이 때라도 택시를 불렀어야 했는데...
가로등의 간격이 점점 드문드문해졌고, 그마저 밝지도 않았다.
당황하자 걸음이 더 빨라졌다.
찐 로컬 리어카 노점상들과 허름한 움막 같은 집들을 지나쳐 가는데 사람들의 눈빛이 아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외국인이 여길 왜 지나다니는 거지 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가로등들은 고장이 나거나 너무 어두워 무용지물이었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약한 불이라도 켜놓은 노점상마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목줄이 없는 개들이 우리를 향해 짖기 시작했다. (아마 누군가가 키우는 개들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개들 주변에 사람이 없어 들개로 보였다)
칠흑 같은 어둠길이 시작됐다.
우리나라의 어두운 골목과는 차원이 달랐다.
불을 다 꺼놓은 밀실같은 어둠이었다.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걷는데 정말 딱 내 발 밑만 보였다.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어 전조등의 불빛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장 1미터 앞도 보이지가 않았다.
더 이상 고장 난 가로등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뒤로 돌아가 그나마 약한 불빛이라도 있는 곳에서 택시를 부를까 싶었지만 개들이 무서워 돌아가지 못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아이도 칠흑 같은 어둠이 계속되니 겁을 먹고 나에게 자꾸 무섭다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웃으며 대답했지만 나도 이미 당혹감을 넘어서 멘탈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5분 정도 더 걸으니 노점상 하나가 나왔다.
노점상 주인 역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쳐다봤다.
노점상에 바짝 붙어 서서 노점상의 약한 불빛을 빌려 어플로 그랩을 불렀고, 의외로 바로 택시가 잡혔다.
택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불량 청소년으로 보이는 무리 중 한 명이 우리에게 '택시? 택시?'하며 말을 걸어왔다.
호객행위를 하는 건가 싶어 택시를 불렀다고 얘기하곤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문제는 택시가 분명히 근처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 쪽으로 오질 않는 것이었다.
전화해도 받지 않았고, 다시 내 멘탈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여행 전에 읽었던 마닐라의 악명높은 치안에 관한 글들이 불쑥 생각났다.
목걸이를 그대로 낚아채 훔쳐간다든지, 청소년 무리가 여행객 하나를 에워싸 돈을 털어간다든지, 흉기로 위협해 강도짓을 한다든지.
여행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믿고 웬만한 일에는 눈 깜짝 않는 나였다.
유럽 여행에서 어쩌다 마주치게 되는 슬럼가를 지나쳤을 때도 이 정도로 무섭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10분 넘게 기다리고 있으니 이번에는 인상이 무서운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는데 따갈로그어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 상황 자체도 너무 무서웠다.
이번에도 눈을 피하려는 데 아까 그 불량 청소년이 이쪽으로 오더니 무서운 아저씨와 따갈로그어로 얘기를 주고받은 뒤 나에게 영어로 통역을 해줬다.
왜 아직도 택시를 안 탔냐, 택시 번호가 뭐냐고 물어와 이미 반쯤 넋이 나가 버린 나는 묻는 말에 충실히 대답했다.
택시를 불렀는데 택시가 오지 않는다, 택시 기사는 전화도 안 받는다고 했더니 나에게 휴대폰을 보여달라고 했다.
순간 이대로 내 휴대폰이 털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멘탈나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휴대폰을 건네줬다.
그랬더니 불량 청소년은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걸어보더니 역시나 받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예약을 취소하고 새로운 그랩 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불량 청소년에게서 내 휴대폰을 건네받은 무서운 아저씨가 새로운 택시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따갈로그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번화가가 아닌 외진 곳의 도로 한 복판이라 설명을 해준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불량 청소년의 무리들이 몰려와 아이를 보면서 귀엽다고 했고, 나는 고맙다고 웃었지만 경계 태세를 놓치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 말로는 엄마가 손을 너무 세게 잡아서 손이 아팠다고 했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서운 아저씨는 나와 아이더러 자신의 차 뒷 자석에 앉아 비를 피하라며 차 문을 열어줬다. (이것도 불량 청소년이 통역해 줬다)
그 말을 듣자 조금 누그러들었던 경계심이 또다시 치솟았다.
최대한 웃으면서 거절하고 비를 맞으며 택시를 찾는 시늉을 했다.
그 사이 불량 청소년들은 내 휴대폰을 보며 지나가는 차들의 차량 번호를 대조했다.
멈춘 차량들을 향해 큰 소리로 번호를 부르기도 했다.
다시 10분 정도 지났을 때, 드디어 택시가 도착했고 그 안도감에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불량 청소년들과 무서운 아저씨는 휴대폰을 돌려주며 우리가 택시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봐 주고 인사도 해주었다.
그들은 아마 불량 청소년도, 무서운 아저씨도 아니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지금도 그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하다.
호텔에 도착하니 긴장이 너무 풀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간단하게 씻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후일담을 전하자면
우리가 택시를 탔던 곳은 호텔에서 불과 5분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나를 그토록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어두컴컴한 거리는 낡았지만 평범한, 그것도 내가 매일 택시를 타고 오가던 거리였다.
너무 캄캄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아저씨와 소년들이 있던 곳에는 사실 커다란 식당이 있었다.
심지어 로컬 식당 중에서는 아주 멀끔한 식당이었다.
그들도 식사를 하러 왔던 거겠지.
문득 중학생 시절, 친구에게 무서운 저승사자 괴담을 듣고 난 후 사흘 정도는 나무의 그림자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믿는 대로 보인다'
동남아에서 유독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한 필리핀에서 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내심 불안했나 보다.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던 사람들.
놀이기구 티켓 값을 대신 치러준 청년.
우리의 호텔 무사귀환을 발 벗고 도와준 소년들과 아저씨.
그 호의들이 나의 불찰로 인해 왜곡되어 색이 바래버린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하고 씁쓸했다.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린 여행자가 내린 결론은 '무모한 행동은 하지 말자.'
마지막 밤이 그렇게 끝났다.
🔽 필리핀 마닐라 여행기 모아보기
[일정]
첫째 날(2/17) : 오후 6시경 수완나품 공항 도착 - 저녁식사(마닐라공항 내 졸리비) - 호텔 이동
둘째 날(2/18) : 호캉스(소피텔 플라자 마닐라) - 저녁식사(RACKS) - 보나파시오 야시장
셋째 날(2/19) : 시티오브드림(망고트리, 드림플레이) - 몰 오브 아시아(SM Mall of Asia) - 디저트 뮤지엄 - 마닐라베이(SM by the BAY)
넷째 날(2/20) : 체크아웃 및 호텔 바 이용(LE BAR) - 공항 이동
'손잡고 해외여행 > 2023.02 마닐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리핀 마닐라] 마지막 날 : 단둘이 떠난 좌충우돌 첫 여행, 안녕! (3) | 2023.11.27 |
---|---|
[필리핀 마닐라] 셋째 날(2) : 몰 오브 아시아(SM Mall of Asia)와 디저트 뮤지엄에서 시간 보내기 (사진 많음 주의) (1) | 2023.11.26 |
[필리핀 마닐라] 셋째 날(1) : 드림 플레이 방문기 (부제 : 취향저격실패썰) (1) | 2023.11.25 |
[필리핀 마닐라] 둘째 날(2) : 기승전 '멀미' (RACKS, 보나파시오 야시장) (1) | 2023.11.24 |
[필리핀 마닐라] 둘째 날(1) : 호캉스 만끽하기 (2) | 2023.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