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프로그램을 마친 후, 해먹에서 뒹굴뒹굴하며 시간을 좀 보내고 나니 어느새 저녁시간이 가까워졌다.
객실로 올라와 로컬 체인 식당인 망이나살에 가려고 채비를 하는데 신나게 물놀이를 한 탓인지 아이가 피곤하다며 잠에 들어버렸고,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오후 7시였다.
그래서 망이나살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보나파시오 야시장으로 향했다.
아이와의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바로 이게 아닌가 싶다.
'내려놓기'
아이가 내 계획의 반만 따라와도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70퍼센트 정도 일정을 소화했을 때는 대성공이라고 생각해야 행복하게 여행할 수 있다🤣
택시를 타고 이동했는데 이동거리가 20~30분 정도라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어 아이에게 멀미약을 안 먹였는데 이 것이 닥쳐올 비극의 시작이었다.
아이가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택시 안에서 토를 하고 말았는데 택시에다 민폐를 끼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어서 잽싸게 여행용 지갑으로 쓰던 파우치에서 돈을 꺼내 가방 안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그 파우치에 아이의 흔적(?)을 받아냈다.
그렇게 나와 10년 가까이 함께해 온 캐스키드슨 파우치가 마지막까지 우릴 위해 불꽃같이 희생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같은 제품을 다시 구하고 싶었지만 오래된 디자인이라 그런지 찾을 수가 없었다는 후문)
이 날 이후로 내 가방에는 항상 멀미약이 들어있다.
보나파시오 야시장에서 저녁식사를 할 생각이었지만 아이가 배가 너무 고프다길래 일단 적당히 깨끗해 보이는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갔다.
야시장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RACKS라는 이름의 로컬 분위기 식당이었다.
나는 현지 치킨 요리를 시켰고, 아이는 와규 스테이크를 시켰다.
일본에 넘쳐나는 와규를 굳이 여기서 먹어야겠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꿋꿋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아이는 와규 스테이크보다 치킨이 맛있다며 내 그릇과 바꿨다.
그렇지만 아이도 멀미로 속이 안 좋았던 터라 조금밖에 먹지 못했고, 나도 그 많은 걸 다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2만 5천 원이나 하는 와규 스테이크는 거의 다 남겨버렸다. 속이 쓰렸다.
https://maps.app.goo.gl/1mJVAXPkUMqsCTM56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을 들르려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니 근처 유료 화장실을 가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음식점을 이용한 우리에게는 '화장실 무료 이용권'이 주어졌고, 이 종이를 손에 꼭 쥔 채로 화장실로 향했다.
로컬 식당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여길 돈 내고 쓰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화장실 시설이 좀 열악했다.
조명등 하나 켜둔 컴컴한 화장실은 어두워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왜인지 변기 옆에 있던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바퀴벌레는 잘 보였다.
화장실 위생에 민감한 아이는 갑자기 자긴 괜찮아졌다며 은근슬쩍 화장실 가기를 거부했지만 이대로 밖에 나가도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잘 달래 마무리했다.
음식점에서 나와 다시 한참을 헤매다가 드디어 보나파시오 하이스트리트를 찾았다!
(나는 분명 구글지도를 보며 걷는데도 길을 잃는 경우가 꽤 있다... 엄마가 길치라서 미안)
마닐라가 필리핀의 수도인데도 불구하고 짓다 만 건물들과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 저녁이 되면 조금 을씨년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하이스트리트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도심'이었다.
강남 한복판처럼 번쩍번쩍한 고층빌딩과 유명 호텔 체인이 줄지어 있었다.
또 유난히 쇼핑몰의 경비가 삼엄했는데 총으로 완전무장한 경비들이 사람들의 가방 속 내용물을 확인한 후 입장시켰다.
외국인의 경우에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바로 들여보내줬는데 자국민은 뒷주머니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쇼핑몰마다 완전무장한 경비들을 처음 봤을 때는 우리나라와는 너무 다른 생소한 풍경이라 좀 위압적이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정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저분들이 악당을 제압해 주실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렇게 들어간 쇼핑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쉑쉑버거.
가장 저렴한 일반 햄버거 단품이 6천 원대로 한국과 가격이 거의 같았다.
이렇게 페소로 쓰여 있는 가격표를 한국 돈으로 열심히 환산해 보며 가격을 확인해 보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나라나 빈부격차가 없는 곳은 없지만 이곳의 빈부격차는 어마어마하다는 걸 몸소 느꼈다.
필리핀의 사무직 종사자들의 한 달 월급이 대략 40만 원 정도라고 하니 전 세계 어디든 맛볼 수 있는 만 오천 원 정도의 햄버거 세트가 이곳에선 상당히 고급 식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블로거님께서 말씀하신 '날 것 그대로의 나라, 필리핀'의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이 근처 사람들은 다 여기로 쏟아져 나온 것처럼 사람들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다들 음식점은 물론 야외 벤치, 계단에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사이를 아이와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며 구경을 다녔다.
야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9시가 넘어버려 남아있는 노점들이 거의 없어 아쉬웠지만 인파 속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활기찬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https://maps.app.goo.gl/k9ZrJxUwCELRwg8B7
10시쯤 되어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아이가 아까 토한 것 때문에 택시를 거부했다.
그러나 택시로 30분, 걸어서는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
게다가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편의점에서 사탕과 킨더조이 초콜릿을 사주며 겨우 달래서 택시에 태웠다.
아이는 택시에서는 겨우 참았지만 결국 호텔에 돌아가서 또 토를 하고 말았다.
멀미약을 챙기지 않은 나의 불찰을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평소 멀미를 하는 아이라면 꼭 멀미약을 챙겨 와서 매일 먹일 것을 추천한다. (천추의 한...)
베트남에서도, 필리핀에서도, 태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운전이 상당히 격하다는 점이다.
동남아에서는 그랩이나 볼트를 이용하여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운전자들이 차선을 이리저리 자주 옮겨 다니기 때문에 나조차도 차를 탄 지 30분 정도 지나면 멀미 기운이 올라왔다.
멀미약만 잘 먹였어도 아이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여행 둘째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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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첫째 날(2/17) : 오후 6시경 수완나품 공항 도착 - 저녁식사(마닐라공항 내 졸리비) - 호텔 이동
둘째 날(2/18) : 호캉스(소피텔 플라자 마닐라) - 저녁식사(RACKS) - 보나파시오 야시장
셋째 날(2/19) : 시티오브드림(망고트리, 드림플레이) - 몰 오브 아시아(SM Mall of Asia) - 디저트 뮤지엄 - 마닐라베이(SM by the BAY)
넷째 날(2/20) : 체크아웃 및 호텔 바 이용(LE BAR) - 공항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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