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문화생활의 기록
지난주, 아이가 감기에 걸려 일주일 가까이 꼼짝없이 가정보육을 했다.
아이는 우리 가족 중에서도 유일하게 감기를 피해 가는 건강체인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제대로 감기에 걸려버렸다.
그동안 집에서 심심했을 아이를 위해, 또 가정보육하느라 고생한 나를 위해(이게 궁극적 목적) 모처럼 힐링타임을 가졌다.
휴일은 항상 아이 위주의 계획을 짜게 되기 마련이지만 이 날은 철저하게 내 위주로 계획을 짰다.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먹고 싶은 거.
아이도 간만에 하는 외출이니 밖에 나간다는 것만으로 즐거워할 게 분명했으니 내 욕심을 좀 부려봤다.
우선 크리스마스 클래식 피아노 연주회에 다녀왔다.
0세 아이부터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이라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도 꽤 많았고, 프로그램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친숙한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공연들은 주말에 열리고, 특히 클래식 공연은 초등학생 미만의 유아는 입장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 나는 종종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다녀오곤 했다.
그러나 한국을 자주 왔다 갔다 하는 남편과 매번 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두 달 전에 미리 구입해 둔 티켓도 남편의 갑작스러운 한국행에 환불도 못 받고 그대로 날려버린 일도 있다.
그래서 나는 꼭 가고 싶은 공연을 제외하고는 웬만하면 유아 동반이 가능한 공연 위주로 표를 예매해 아이와 함께 동행한다.
본격적으로 함께 다니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이 넘었다.
처음 함께 공연을 보러 갔을 때는 아이는 모르는 음악이 나오면 지루해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다 몇 번 다녀오고 나서는 짬이 좀 찼는지(?) 혹시나 지루할까 싶어 아이에게 귓속말로 말을 거는 나에게 아이는, '공연 중에는 조용히 해달라'며 문화시민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클래식 공연부터 인형극, 뮤지컬, 오페라 등등 크고 작은 다양한 공연들과 미술관에 동행하여 함께 추억을 쌓았다.
어느덧 12월이 되어 마지막 페이지를 남겨놓고 있는 나의 다이어리를 1월부터 뒤적여보았다.
이번해에도 알차게 잘 다녀왔다.
1월 고베 패션 미술관, 세계의 결혼식전
1월 고베 문화홀, 인형극 펭귄 탐험대
1월 고베코랜드, 패밀리 콘서트
4월 효고 현립 미술관, 반 고흐 어라이브
4월 타니구치 동화작가님의 워크숍
6월 고베 문화홀, 브레멘 음악회
9월 나다 구민홀,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11월 고베 문화홀, 현악단-합창단 음악회「내가 좋아하는 노래」
11월 고베 패션 미술관, 색연필 아트전
11월 고베 문화홀, 오페라 카르멘
12월 나다 구민홀, 크리스마스 피아노 콘서트
그러고 보니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일본 어린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캐릭터 앙팡맨(호빵맨)의 전국 공연이 여기 고베에서도 열렸다.
대학생 때 수강신청하던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광클을 시도해서 1층의 나름 괜찮은 자리를 잡았다.
예매한 게 공연하기 두세 달 전쯤이었는데 하필 공연이 가까울 때즈음에 내가 정신을 놓고 살았나 보다.
까맣게 잊고 있던 티켓을 꺼내 들었을 때는 절묘하게도 공연날로부터 하루가 지나 있었다.
심지어 다이어리에도 별표까지 치며 기록해 놨는데 왜 그랬을까.
아이는 얘기를 듣고는 대성통곡을 했다.
표 역시 당연하게도 무용지물이 된 상태였다. (내 8만 원...)
내가 더 울고 싶었다.
이를 계기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공연장 속 우리는 동상이몽이다.
내가 공연을 보면서 느끼는 전율과 감동은 아이가 느끼는 감정과는 서로 다를 것이다.
아이가 지금의 경험을 토대로 쌓아 언젠가 음악과 미술을 통해 재미를 느끼고, 위로를 받고, 감동을 얻고, 행복을 알아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