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베에 산다
어느덧 고베에 자리를 잡은 지도 햇수로 11년 차를 앞두고 있다.
외국인 여행객으로서 처음 고베에 왔을 때, 고베는 나에게 있어 '깨끗한 도시, 그렇지만 일본스럽지 않은 도시'였다.
해외여행을 온 이상, 한국과 다른 일본스러움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도시 자체가 하나의 유적지와 같은 교토와 난바 도톤보리로 상징되는 옛 상업도시의 오사카에 비해 야경으로 상징되는 고베는 어쩐지 매력이 덜 했다.
고베의 야경은 일본의 3대 야경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그렇다고 '일본스러운'야경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은 일정으로 간사이 여행을 오는 친구들이 교토와 고베 일정을 두고 고민 중이면 나는 고베 일정을 없애고 교토를 넣으라고 얘기한다.
그들도 내가 그랬듯 '일본스러움'을 느끼고 싶어 이곳을 찾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이드북을 봐도 고베는 오사카나 교토에 비해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일본인들 사이에서의 고베는 좀 더 후한 평가를 받는다.
타 지역으로 여행을 가서 현지 사람들 혹은 다른 여행객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빠지지 않는 주제가 바로 '어디에서 왔는지'인데 고베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반응이 꽤 좋다. (사실 나는 한국인이지만 하하하)
내가 고베에서 왔다는 말을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오샤레나 마치'인데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세련된 동네'정도가 되겠다.
그도 그럴 것이 항구도시인 고베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개항한 곳이라 서양문물이 제일 빨리 들어왔고, 덩달아 외국인도 많이 유입된 덕분에 서양식 건물이 많다.
1868년에 처음 개항하면서 고베에는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고, 10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남아있는 이 서양식 건물들을 개조하여 관광지로 운영하거나 카페나 점포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 중 하나인 고베 구거류지에는 이러한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모여있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 양식의 구거류지 38번관과 그 일대에는 에르메스를 비롯해 루이뷔통, 셀린느, 몽클레어 등 고가의 브랜드들이 옛 서양 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레트로한 근대 건축물에서 하는 쇼핑은 보통의 백화점에서 쇼핑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즐거움이 있다.
마치 유럽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또 고베 하면 유명한 것이 '빵'이다.
개항으로 인해 식문화 역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 실제로 고베에는 빵집과 제과전문학교가 많고, 또 이 작은 도시에서 시작한 빵집이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 체인점을 내는 경우도 많다.
가이드북에 실려 있는 고베의 빵집 DONQ(돈크)나 이스즈 베이커리 같은 체인점 말고도 개인이 운영하는 베이커리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지역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고베 사람들 역시 고베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고베는 오사카, 교토, 나라 등과 더불어 간사이 지역으로 묶이고, 특히 오사카를 갈 때 함께 들르는 여행지 취급을 받곤 한다.
그러나 내가 본 고베 사람들의 대부분은 오사카와 하나로 묶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베 사람들에게 오사카는 옛 상업도시로 시끌벅적한 시장통 같은 이미지(우리의 상상 속 머리에 수건 두르고 이랏샤이마세를 외치는)이기 때문인데, 우아하고 세련된 도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고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같은 취급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할까.
간사이 지역의 지역감정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 보면 교토 사람들 역시 교토에 대한 프라이드가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오사카와 한 솥밥 취급을 받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고베가 오사카와 묶이는 것을 은근히 싫어한다면 교토는 대놓고 싫어하는 느낌이다.
교토 사람들은 역사가 긴 교토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하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콧대가 높다', '거만하다'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종종 받곤 한다.
특히 '교토식 화법'이라는 불리는 교토 사람들의 특유의 화법이 있는데 툭 까놓고 표현하자면 '빈정대는 화법'이다.
타인을 은근히 깎아내리거나 불쾌감을 주는 화법인데,
예를 들어 이웃 사람에게 '아이가 피아노를 잘 치네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대개 칭찬으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교토식 화법으로는 '시끄러우니까 피아노 치지 말라'는 의미이다.
또 '손이 예쁘시네요'라는 말 역시 일반적으로는 말 그대로 손이 예쁘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이지만 교토식 화법으로는 '집안일 안 하는구나?'라는 속뜻을 가진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간토(도쿄를 중심으로 그 주변 도시들)와 간사이(오사카 중심으로 그 주변 도시들)의 대결이 될 경우, 서로에 대한 적대심은 온데간데없이 하나로 뭉친다.
마치 부산과 대구가 옥신각신하다가도 서울에 대항하면 대동단결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일례로 '東京弁 도쿄벤'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도쿄 사투리'이다.
도쿄에서는 표준어를 사용하고, 간사이에서는 간사이벤(関西弁)이라고 하는 간사이 사투리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쿄말을 표준어라고 표현해 버리면 간사이 사투리는 '비'표준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표준어를 도쿄벤, 즉 도쿄 사투리라는 말로 도쿄를 슬쩍 깎아내리는 것이다.
실제로 도쿄에 상경한 사람들 중 간사이 출신의 사람들은 타 지역 출신 사람들에 비해 사투리를 바꾸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간사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나 역시 이곳에 10년 동안 살다 보니 고베를 비롯한 간사이에 애착을 꽤 가지고 있다.
실제로 내가 사용하는 일본어는 간사이벤이다.
그 이유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한국에서 가르치는 일본어는 표준어이고, 한국에서 착실히 공부해 일상 회화가 가능한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일본에 왔을 경우, 거주 지역의 영향을 살짝 받을지언정 대개 배운 그대로 표준어를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가서 살아남으려면 배워지겠지'하는 생각으로 기초만 간신히 쌓은 수준에서 일본으로 오게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영어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다.
즉, 무(無)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레벨에서 일본어를 배우게 된 것인데 오사카에서 거주하며 체득한 일본어는 간사이벤이었고, 지금도 고치지 않고 있다. (딱히 고칠 생각도 없다.)
어쩌다 보니 글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오래 보아야 예쁘다'라는 말처럼 나는 아직도 고베의 무궁무진한 매력을 발견하는 중이다.
주변에서 내게 일본에 사는 이유가 뭔지 자주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동문서답 같은 대답을 하곤 한다.
'고베에 살아서 행복하다'고.